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투자사에 퇴짜맞고 현빈에게 까이다… 첫 설계 11년만에 대박

“《 영화의 일생은 매미의 그것과 같다. 기다림은 길고 절정은 짧다. 하지만 매미의 울음처럼 여운이 강렬한 작품이 있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인 영화 ‘건축학 개론’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용주 감독은 2001년 시나리오 구상을 시작해 11년 만인 올해 3월 22일 작품을 개봉했다. 올해 9월 DVD가 나오면 이 영화는 추억이 된다. 짧은 여름을 울어 대기 위해 10년 넘는 세월을 땅속에서 보내는 매미처럼 한 작품에 인생을 거는 감독이 흔하다. 관객의 마음을 휘저었던, 그래서 더 살갑게 느껴지는 영화 ‘건축학개론’, ‘나의 일생’을 감독과 영화계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정리했다. 》
 
 
2001년 6월. 감독이 ‘내’ 모체를 잉태한 때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감독은 건축설계소를 그만두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1년 반 동안 일하며 시나리오 습작을 했다. 첫 장편이 고교생의 짝사랑을 그린 멜로였다. 남녀의 시선으로 나눠 쓴 사랑 이야기로 ‘건축학개론’과 꼭 닮았다.
 
촬영이 몇 달 늦어지자 시간이 난 감독이 짝사랑과 멜로를 버무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2003년 11월 드디어 나를 위한 시나리오가 나왔다. 이때부터 내 이름은 ‘건축학개론’이었다. 큰 얼개는 지금과 비슷하다. 남녀가 만나서 함께 집을 짓는데, 둘이 과거에 서로 좋아했던 관계였다는 것.
 
2004년 4월 제작사 싸이더스가 시나리오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 감독과 계약을 했다. 나의 탄생은 시간문제 같았다. 여주인공 서연(한가인)의 직업을 아나운서에서 리포터로, 다시 주부로 바꿨다. 하지만 캐스팅이 안 됐다. 50명이 넘는 주연급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었지만 모두 “노”였다. 충무로의 주연급 배우는 모두 내가 싫다고 했단다. 투자사에 ‘까인’ 건 셀 수도 없다. 모두 “이런 밋밋한 시나리오로는 안 된다”고 했다.
 
힘이 빠진 감독은 ‘외도’를 했다. 2006년 1월 영화 ‘반짝반짝 빛나는’의 감독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가 ‘엎어졌다’(제작이 무산됐다). 2006년은 영화계에서 외환위기 같은 시절이다. 2005년 영화계에 외부 자본이 들어오면서 100편이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실패작이 늘면서 투자가 얼어붙었다. 2007년 1월 싸이더스와의 계약은 없던 일이 됐다.
 
3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부모님 집에 얹혀 살던 감독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봉’(감독 데뷔)이 중요했다. 2008년 3월 나를 잠시 컴퓨터 파일 속에 처박아 두고 공포영화 ‘불신지옥’ 시나리오를 6개월 만에 써 2009년 8월 개봉했다.
 
 
그래도 내게 미련이 남았었나 보다. 이때 감독의 컴퓨터 ‘건축학개론 폴더’에는 시나리오가 1000개 이상 들어 있었다. 2010년 5월까지 흥행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를 다시 수정해 여러 제작사와 투자사를 찾아다녔다. 주위에서는 “너 할 만큼 했다. 새로운 것을 해라”며 말렸다. 이제 내 시나리오는 이면지로 쓰일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귀인’을 알아보는 눈은 따로 있다고 했던가. 충무로의 ‘미다스의 손’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우연히 시나리오를 보고 혹했다. 공포영화를 못 보는 심 대표는 ‘불신지옥’을 알지 못했고 자연히 감독의 존재도 몰랐었다. 심 대표는 “명필름에서 준비한 영화 중 엎어진 영화는 없다. 제목도 좋은데 바꿀 필요가 없다”며 힘을 실어 줬다. 제작사와 두 번째로 도장을 찍었다. 2010년 8번째 달력이 넘어갔다.
 
계약 직후부터 2011년 1월까지 8번 시나리오를 고쳤다. 관객이 스크린에서 본 바로 그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그 사이 여주인공 서현의 직업은 아나운서, 리포터, 매 맞는 주부, 아이돌, ‘성인돌’을 지나 이혼녀로 확정됐다. 서현과 남자주인공 승민(엄태웅)이 집을 다 짓고 하룻밤을 보내는 설정도 있었지만 “아침 드라마 같다”는 지적이 있어 ‘담백하게’ 키스 신으로 바꿨다.
 
명필름이 제작을 맡아도 톱스타들은 여전히 시나리오에 ‘뭥미(뭐임?)’라는 반응이었다. 여기저기서 다 난색을 표했다. 업계에서는 원빈, 현빈, 장동건도 외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결국 명필름이 만든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출연했던 엄태웅이 승민 역을, 한가인이 서현 역을 맡았다. 심 대표와 감독은 “첫사랑 역은 성형 안 한 예쁜 배우라야 한다”고 한가인을 고집했지만 투자사인 롯데엔터테인먼트는 “한가인이 영화 경력이 별로 없다”며 우려했다. 이제훈과 수지는 어린 주인공 역에 뽑혔다. 하지만 캐스팅에 큰 의견 충돌은 없었다. 워낙 하려는 배우가 없었으니까….
 
2011년 10월 25일, 드디어 크랭크 인. 모두 51회 촬영을 거쳐 2012년 1월 8일 촬영을 마쳤다. 순수 제작비는 24억8000여만 원. 이 중 주연배우 4명의 출연료가 6억5000만 원, ‘납뜩이’ 조정석을 포함해 조연들 출연료는 모두 1억 원이다. 여기에 스태프 개런티 5억9000여만 원이 들었다. 업계에서는 엄태웅은 출연료가 3억 원 이상, 한가인은 2억 원 이하라고 본다. 이제훈은 이 영화 이후 주가가 많이 올랐다. 신인인 수지는 출연료가 많지 않았다.
 
2012년 3월 22일 드디어 내가 극장에 걸렸다. 한 달 만인 4월 22일 관객 321만 명을 넘으며 멜로영화 흥행 기록을 깼다. 이전까지는 305만 명을 모은 ‘너는 내 운명’(2005년)이 관객을 가장 많이 울린 영화였다. 호사다마일까? 극장 상영 중이던 5월 8일 불법 복제 파일이 인터넷에 떴다는 소식이 들렸다. 수십만 명이 불법 복제 파일을 봤다. 피해액은 7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예정보다 빠른 5월 16일 인터넷TV(IPTV) 서비스를 시작했다.
 
▶[채널A 영상] ‘건축학개론’ 첫사랑의 소리 들려준 이지수 음악감독 인터뷰
 
나는 2일 현재 관객 410만 명 이상을 모아 311억 원이 넘는 수익을 냈다. 그중 10억 원가량은 IPTV와 주문형비디오(VOD) 등 부가판권에서 나왔다. 마케팅 비용 17억여 원을 포함해 42억여 원의 제작비를 들인 것에 비하면 꽤 ‘남는 장사’를 했다. 돈보다도 관객의 추억이 된 게 더 기쁘다.
 
영화 속 한가인의 집인 제주 서귀포시 세트는 갤러리 겸 카페로 리모델링해 10월 개관한다. 1층에는 영화 스틸과 소품을 전시한다. 나를 추억하시는 분들, 그곳에서 다시 만나요.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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